2019. 9. 26. 04:33ㆍ축구이야기
Per Napoli - 나폴리를 위해
우리는 나폴리에 1명이 아니라 3백만의 축구 감독을 가지고 있다.
모든 남자들, 여자들은 무엇이 나폴리를 위한 최선인지 안다. 공원에 있는 모든 네 살짜리 꼬마 녀석들도 어떻게 우리가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는지 안다. 자신의 정원으로 가는 모든 90살 할머니도 우리가 왜 우리의 포메이션을 변화하는 게 필요한지 당신에게 설명할수 있다.
그 느낌.. 그 열정, 이것은 우리 피안에 있다.
나폴리에서 축구란 마치 종교와 같다. 그리고 스타디오 산 파울로는 교회다. 나폴리는 이 지역이서 유일한 메이저 클럽이고 나폴리 사람들은 이의 부분이라고 느낀다 - 왜냐하면 그들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어났을 때 생각하는 것,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꿈을 꾸는 것은 축구다. 때때로 축구는 문제들 중 오직 유일한 것으로 느껴진다.
나는 축구와 29년간 함께했다. 이와 같은 느낌은 모든 나폴리인의 피에서 흐르고 있지 않을까? 아마 그들과 나의 안은 똑같을 것이다. 이 느낌은 내가 슬로바키아에 있을 적 일곱살때와 똑같다.
1994년 미국에서 월드컵이 열렸다, 그리고 내가 살았던 도시 반스카비스트리차에서 아마 오후 11시에 경기가 시작되었을 거다. 부모님은 하루 종일 고단했던 일자리로부터 힘들어하며 집으로 들어왔고 내가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것을 보았다. 티비에서 브라질의 많은 경기들을 중계했다. 그 팀은 매우 빨랐고, 그전에 내가 결코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브라질은 두 명의 공격수들이 있었다. 로마리오와 베베토. 나는 그들에게 매료되었다. 드리블링, 패싱, 스피드 -나는 될수있는 한 그들의 모든 게임을 시청했다. 브라질리언들이 했던 축구는 내가 이때껏 슬로바이카에서 경험했던 것과 다른 것이었다. 아니 내가 티비로 시청했던 유럽 대항전의 경기와도 달랐다. 브라질리언의 축구는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갔으며 창의적이었다.
나는 고향에서 축구를 3년간 했다. 부모님은 내가 축구를 시작하기 전 처음으로 축구화를 사주셨다. 내가 축구를 시작했을 때, 코치는 나를 미드필더에 투입시켰다. 그는 나에게 종종 공격수의 위치까지 올라가는 것을 요구했다. 그 후 나는 포지션을 단 한번도 바꾼 적이 없다. 나는 10번의 역할을 즐겼다. 나는 창의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전체 피치를 관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티비를 볼 때면, 나와 동일한 포지션에서 플레이하는 선수들을 찾으려고 한다. 나는 지네딘 지단과 파벨 네드베드를 관찰했다. 그들은 빠르다, 하지만 나처럼 매우 빠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위대한 패서들이었고 게임을 매우 잘 읽는다. 나도 그들과 같은 플레이어가 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어떤 팀에 있던지 나의 포지션에서 머무를 것을 확신했다.
내가 집을 떠났을때 나는 15살이었다. 나는 슬로반 브라티슬라바에서 뛰기 위해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로 이주했다. 이 클럽은 내가 이제껏 경험한 것보다 거대했으며 높은 수준의 축구를 구사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았다. 2년 후 나는 8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새로운 클럽,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인생으로의 이탈리아로 떠났다.
나는 집에서 더욱 멀어졌지만 프로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나의 꿈에 한걸음 더 나아갔다. 브레시아는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이다. 그곳에 적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집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브레시아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나를 환대해주어 소속감을 느꼈다.
나는 처음 몇달간 학교를 다녔어야 했는데 이탈리아를 하지 못해서 힘들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랑이 있었다. 나의 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내가 집처럼 편하게 지내기를 원했다. 그들은 나를 그들의 집에 초대하거나 도시 주변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먹을 음식이나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최선을 다해 설명해주었다.
점차 이탈리아 삶의 방식이 나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 축구 경기장에서도 나는 내 게임에 적응을 했다. 나는 브레시아 성인팀에 들어가게 되었고 내가 이전에 경험했었던 수준보다 높은 축구를 경험했다. 3년 후 나는 다시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계속 이탈리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브레시아는 나를 나폴리에 2007년 매각했다.
나의 나폴리 첫날은 라베찌에게도 첫날이었다. 보드진들은 우리에게 스타디오 산 파올로를 보여주었고 언론에게 우리를 소개했다. 몇 시간 동안 둘러보며 나는 이 장소는 내가 이때껏 경험했던 곳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었다.
경기장 벽에 전시되어있는 나폴리의 위대한 선수들을 보았다. 마라도나, 페라라 그리고 브루스 콜로티. 나는 세리에 A 트로피들과 코파 이탈리아 트로피들을 보았다. 이는 나폴리가 특별한 도시이고 나폴리가 특별한 축구클럽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도시에 있는 나의 첫번째 집을 보았을 때, 나는 계약에 사인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이미 나의 이름과 나의 이야기를 아는 듯했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브레시아에서 느꼈던 사랑은 나폴리 팬들의 열정과 거의 비교할 수 없었다. 브레시아에서 나는 어린 소년이었고,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나폴리에서는 나폴리 팬들 없이 커피를 마시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폴리 팬"은 나폴리에서 의미없는 말이다. 당신이 나폴리에서 태어났다면, 당신은 나폴리 팬이다.
몇 년 후 나는 나폴리인들의 열정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12년 코파 이탈리아에서 승리를 했을 때, 나는 나폴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그 트로피를 차지하는데 나폴리는 25년이 걸렸었다. 로마에서 우리가 이긴 후, 나는 도시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정말 미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그때 그것을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문장이다. 진심으로, 정말로 미쳤었다. 우리가 로마로부터 돌아온 후 아파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도시의 모든 창문에 깃발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법과 같았다. 여기에서 승리는 다른 곳의 승리보다 특별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수로서 이긴 것이 아니라 도시로서, 도시의 사람으로서 승리를 쟁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폴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그 이후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 리그 경기를 할때 나폴리는 다른 측면을 보여주었다. 다른 국가에서 온 팀들은 여기서 우리 팬들의 열정과 환호에 의해 주눅이 든다. 우리는 유럽에서 아니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큰 경기장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서포터들은 인생을 더욱 거대하게 만들어준다.
스타디오 산 파올로에 서서 챔피언스 리그의 노래를 들으면 전율을 느낀다.
축구는 나에게 중요하다. 그리고 나폴리에서 10년간 뛰었던 것은 내 인생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내가 나폴리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이유는 축구 그 이상이다. 나폴리에서 나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가족 - 내 마음속에 나폴리는 특별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돈과 트로피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나의 영혼이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나폴리는 나에게 그것을 줬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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